아내_폰 대신 책 보기

[불량책객]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 김규림, 송은정, 봉현, 이지수, 김희정, 강보혜, 김키미, 신지혜, 문희정, 임진아

불량책객 2021. 7. 23. 12:53

  나의 작은 집에서 경험하는 크고 안전한 기쁨에 대하여 라는 부제를 달고 나온 책이다. 10명의 여성 작가가 같이 썼다. 마감일기가 8명의 여성 작가인 것처럼. 굳이 여성일 필요는 없는데.

 

김규림

  매해 가장 나다운 생활을 하게 해주는 열 가지 물건을 고른다고 한다. 김규림 작가는 거울, 의자, 조명, 시계, 우유컵, 클립보드, 커피 드리퍼, 문구 보관함, 책, 아이패드이다. 그럼 나는?

1. 나는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탭(회사꺼) + 작년 겨울 스타벅스 프리퀀스를 모아서 교환한 탭파우치 대용 폴더블 크로스백  

2. 폰, 영상통화부터 통화, 문자, 쇼핑, 게임, 카메라, 웹서핑까지 뗄레야 뗄 수 없지  

3. 도서관 대출증

4. 나이키 운동화, 사계절 내내 한켤레로 버티다 밑창 닳으면 집 근처 슈즈 마트(?) 같은 곳에서 적당한 걸로 다시 구입, 회사 지원으로 나이키 에어맥스를 한번 사본 후 줄곳 나이키만 신음 

5. 마스크, 나를 지켜주는 방패, 역시나 회사에서 계속 주기 때문에 내돈 들여 사본 적이 딱 두 번, 내년에는 사라졌으면 

6. 닥터브로너스 베이비 언센티드 퓨어 캐스틸 솝,  거품 용기에 물이랑 같이 넣어 사용, 이걸로 세수도 하고 사워도 하고

7. 아비노 스킨 릴리프 모이스처 라이징 바디로션, 바디로션인데 몇 년째 얼굴에 바름 

8. 다이소 칫솔, 5개 2천원짜리 미세모, 내 최애 칫솔, 사용한 지 10년 넘은 듯

9. 다이소 치실, 두 줄짜리 90개 3천 원, 내 최애 치실, 한 줄 치실만 쓰다가 우연히 급하게 두줄 치실을 사서 써본 후 애용함    

10. 검은색 키플링 기저귀 가방, 사촌언니가 사줌, 최애 출산선물, 활용도 짱짱짱

 - 마음에 꼭 맞는 친구가 있는 것처럼 나와 결이 꼭 맞는 물건이 곁에 있다는 것 또한 얼마나 든든한 일인지 모른다. 올해는 어떤 물건이 내 삶으로 들어오게 될까? 혹시나 운명적으로 평생을 함께할 사물을 만나게 되지는 않을까? 오늘도 아끼는 물건들 틈에서 즐거운 상상을 해본다.

 - 책상을 만드는 일은 앞으로의 무소속 생활에 대한 일종의 다짐과도 같았다. 창작을 계속할 것, 집에서의 나날을 게을리 보내지 않을 것. 매일 출근하는 루틴이 사라졌으니 자연스럽게 나의 주생활 공간은 집이 될 터였다. 생활이 처지지 않고 쾌적하게 돌아가려면 집을 작업에 적합한 공간으로 만들어야 했다. 

 - 무언가를 만들고 쓰고 찾아보고 읽는 모든 활동을 하는 책상은 내가 마음껏 뛰놀 운동장이자 마음의 체력단련장이라고 할 수 있다.

 

송은정

 - 우리는 모두 다른 삶을 살고 있지만 글을 쓰는 순간만큼은 절대적으로 혼자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누구도 대신할 수 없음을 깨끗이 인정하고 묵묵히 쓰기로 결심한 사람들이다.

 - "양말 깁기나 뜨개질만큼 실용성이 없고, 철저하게 이기적인 나만의 일"을 계속해나가는 사람의 이야기는 몇 번이고 반복해서 들어도 지겹지 않다.

 - 남편은 텔레비전을 보다가 스르륵 잠드는 것을 좋아하는 이상한 고집이 있는데, 그때마다 나는 소파에 가로누운 남편 옆에 굳이 붙어 앉아 역시나 그러거나 말거나의 마음으로 책을 펼친다.

 - 대나무숲에서 고함을 지르듯 성글게 쓴 일기로부터 비롯된 각별한 기억들이 주머니 속 금화처럼 우수수 쏟아져 나왔다.

 

봉현

 - 해가 뜨기 전에 일어나 밖이 천천히 밝아지는 것을 느끼는 게 좋다. 뮤즈가 오기를 막연히 기다리지 말고 내가 약속한 시간을 지키면 뮤즈는 어김없이 그 시간에 찾아와 준다. 나는 아직도 그 말을 굳게 믿는다.

 - 나를 등 떠미는 것도, 나를 일으켜 세우고 돌보는 것도 모두 나다.

 - 밤을 길게 두면 외로워진다. 아침의 마음을 기억하며 살아야 한다. 밤의 시간을 최소화하고, 아침을 길게 살아야 한다.

 - 건조대에 커다란 이불 빨래 따위를 넣어 놓으면 하루종일 집에서 세제 향이 나는데, 집 전체가 비누방울에 둘러싸인 것 같다.

 - 침대는 연인과의 은밀한 공간이었다가, 나의 슬픈 동굴이 되었다가, 세상에서 가장 편안하고 안전한 쉼터가 되기도 한다. 침대는 결국, 어떤 방식으로든 사람의 껍질을 모두 벗겨내어 본질을 드러내는 곳.

 

이지수

 - 어제가 오늘 같고 오늘이 내일 같은 반복되는 일상이지만, 나는 루틴에 몸을 싣고 하루를 보내는 이런 날을 꽤 좋아한다. 그건 그 하루가 안정적이고도 평화롭게 굴러갔다는 뜻이므로.

 - 할 때는 한 티가 잘 안 나지만 안 하면 안 한 티가 마구 나는 게 집안일이다. 세탁기는 사흘만 돌리지 않아도 빨래바구니가 폭발한다.

 - 집콕 육아란 무엇인가. 그것은 직장 상사가 잘 때 빼고 24시간 옆에 딱 붙어서 이 업무 저 업무 정신없이 시켜대는 상황과 비슷하다. 게다가 그 상사는 성질이 어찌나 급한지 뭐든 빨리 해 달라고 난리야, 말도 잘 안 통해, 야근비도 안 줘. 그 와중에 삼시세끼도 차려드려야 하지, 간식도 챙겨드려야 하지, 응가가 나오신다 하면 앞에 앉아 괘변 응원송도 불러드려야 하지, 다 싸시면 닦고 씻겨드려야 하지. 이만하면 제가 왜 이러는지 아시겠죠. 요컨대 아이와 함께 있을 때는 나의 자아나 자유가 한없이 0에 수렴한다고 보면 된다.

 - 오늘은 언니한테서 영상통화가 걸려왔다. 이렇게나마 나누는 대화가 너무 소중하다. 이 시국의 온기는 픽셀을 타고 오간다.

 

김희정

 - 방과 책상이 어지러운 가운데 맘 편하게 더 널브러질 때의 안정감은 사실 꽤 만족을 준다. 인간은 망가짐의 쾌감을 아는 종족이다.

 

문희정

  두 아이의 엄마이다. 글을 쓰고 1인 출판사를 운영한다. 아이들이 어린이집에 간 후 사무실로 쓸  조용한 주택을 구입했다. 밤에 비워두는 게 아쉬워 북스테이를 시작했다. 숙박객을 위해 매번 웰컴북을 골라준다. 글쓰기 교실도 운영한다. 최고로 부럽다.